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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사진

The letter from Korea..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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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6.25로 찾아보면 나오는 요약입니다.

우리는 6.25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1950년 6월 25일, 당시는 일요일이었고, 군인 상당수가 휴가 혹은 외박을 나간 상황의 새벽에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라는 것, 불과 몇 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당시 정부는 서울시민들을 안심시켜가며 부산으로 피난했다는 것,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자 급파된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패하면서, 당시 부대장이 포로가 되었던 일, 낙동강 전선까지 파죽지세로 밀림, 유엔군 참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그리고 9월 28일 서울 수복. 10월 1일 국군의 날, 국군이 38선을 넘은 날. 11월 1일 국군 압록강 도달, 그리고 27일 중국군 개입.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의 무수한 전투들.

무작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네이버 백과사전의 6.25 관련 본문과 더해 나열해봤습니다. 그밖에도 여순사건, 지리산 빨치산, 태극기 휘날리며 의 소재가 된 형제, 청년 학도병 등, 6.25를 위시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에 진 우리나라가, 3-4위전에서 터키와 맞붙었습니다. 그리고 나온 표현. 형제의 나라. Korean War를 기억하는 나라. 2002 월드컵에서야 비로소 우리 시야에 들어온 그 나라.

앞에서 쭈욱 열거했습니다. 우리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탱크를 앞세워, 모두가 잠든 시간에 기습적으로 쳐내려온 북한이라고, 너무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30대 중후반입니다. 올해는 전쟁 60주년이라죠? 전쟁은커녕, 그 후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도 겪지 않은 제가, 마치 그 곳에 있었던 양 이렇게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게 다소 의아합니다.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죠. 한강다리 폭파, 그를 지휘한 지휘관 처형, 라디오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의 기만, 초기 피난민을 향한 미군의 오폭, 스미스부대 궤멸, 그리고 포로로 잡혔던 딘 소장 얘기, 낙동강 전선, 학도병들이 대거 투입되어 희생된 포항 전투, 팔미도 등대와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38선 진출, 맥아더 장군의 폭격 건의 묵살과 퇴임, 중국군 개입, 흥남철수. 배운 것도 있고, 책을 통해 읽은 것도 있습니다만, 이 전쟁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참 많이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당장 몰라도 되는 얘기들이지만, 알아서 좋은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이 다소 부정적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다소 부정적 어조로 이 한 구절을 썼습니다. 이 내용에 부정적인 건 아닙니다. 제가 부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혹은 널리 알려진, 가르치고자 하는 것들이, 이 전쟁이 품고 있는 비극적인 것들과 적대적인 것들이 국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앞에서 쭈욱 열거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또 한 번의 되풀이에서 빼놓은 것이 있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물론 유엔군 참전 이전에 스미스부대를 필두로 우리와 함께 싸워준 미국도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6.25라는 전쟁에서 유엔군에 대해, 단순히, 그들이 우리를 도왔다는 것 말고 무엇을 더 알고 계신가요?

저는 모릅니다.
어느 나라가, 어떤 경위로, 어떻게 우리를 도왔는지 모릅니다.
제 어릴 적, 저희 집에는 총 15권의 만화로 구성된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고, 저는 그 책을 통해 지금 6.25라 말하는 한국전쟁에 대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지금 당장 기억나는 유엔군 에피소드를 말해보라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퇴각하는 북한국 패잔병들과, 갓 참전해 피아 구분이 안 되는 호주군이 만나, 어이없는 파티와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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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이병용님. 즉석해서 낙관을 찍어 명함으로 주신 이 분과의 첫 대화는 진한 커피였습니다. 오후의 커피타임, 그리고 석 잔의 예절. 바로 그가 4년 전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에서의 일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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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터키. 한국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 어떻게 해서 그곳을 가게 되었는지, 그곳에서 만난 사람, 사진에 담은 사람이 누구인지, 꽤나 긴 시간에 걸쳐 얘기해줬습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국의, 살아남아있는 참전용사들과 그 미망인들을 사진에 담아, 이를 기리는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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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펼쳐 보여준 터키 지도에는 숫자가 쓰여진 스티커가 빼곡이 붙어있었고, 그 숫자를 따라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내리 세 차례 방문한 곳의 얘기를 해줍니다. 당시 18세의 나이로 미망인이 되어버린 한 할머니를 만나러 말입니다.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신혼의 한 청년, 그리고, 그 부인의 사진이 각각 조그맣게 있었다 합니다. 이병용님은 이 두 사진을 합쳐 두 사람의 부부사진으로 만들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된 18세의 미망인에게 전해줬다 합니다. 그러면서 보여준 한 권의 책에는 사람들의 명단이 들어서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터키군의 명단이라고 하더군요. 사진이 들어설 자리는 있으나, 사진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이들의 얼굴을 찾아주는 것 또한 자신의 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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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은 어떤 것일까요? 6.25 전쟁? 동족상잔의 비극? 사회주의의 침략? 냉전시대의 이념싸움? 대략 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호전적이지 않은 표현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한국전쟁을 말하면서 뿜어내는 건, 독기와 살기입니다. 북한을 향한 적개심뿐입니다. 그 속에서, 이렇게 젊은 청춘을,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싸워준 참전 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찾아보려 해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 앞서, 네이버 백과사전의 요약으로 거슬러 가볼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 불법 남침이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전쟁입니다. 합법과 불법이 있을 수 없는 게 전쟁입니다.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게 전쟁입니다. 백과사전이라면, 적어도 이런 설명에 대해 제 3자의 담담한 시선으로 기록해야 할 것인데, 이렇듯 우리만의 시간에 감정을 덧대어 호전적으로 풀어냈습니다.

기껏 호국 보훈의 달로 6월을 지정하고, 그에 맞춰 행사를 열고,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고, 이제는 가실 날이 멀지 않은, 얼마 남지 않은 참전용사 분들을 보여주고, 그저 행사 한 번 마련해서 식사 대접하고, 관광 시켜드리고 하는 게 과연 고마움의 표시인가요?

해외 참전용사들 사이에서 한국전쟁은 Korean War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해서, 1953년 7월 27일에 끝난, 우리는 휴전이라 하지만, 그들은 사실상 종전으로 생각할, 약 1천여 일에 걸쳐 벌어진 전쟁입니다. 그저 단순히 6월 한 달을, 호국 보훈의 달이라 해서 이런 저런 행사로 기리는 게 전부일 수가 없는 역사적 사건이 한국전쟁이라는 얘깁니다.

올해로 60주년. 60주년이라는 표현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은 기념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휴전이 선언된 뒤 57년이 흘렀다는 것은 앞으로 더욱 상기해야 합니다. 젊은 청춘을 불살랐던 우리의 어르신들, 그리고 해외 참전국의 참전용사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이제 팔순을 넘긴 이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비록 감사합니다 한 마디일지라도, 그토록 우리를 사랑해준 그 분들을 위해서 꼭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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